2023년 12월 13일 수요일

 11월 셋째 주 평일 밤

내 뒤에 따뜻한 게 붙어있다. 따뜻한 것이 내 등에 꼭 붙어서 나를 부둥켜 안고 있다. 새근새근 숨을 쉰다. 나 아닌 생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 눕히는 것 덥히는 것. 마법 같다

언어에는 교란이 있다. 애를 써서 상황을 성문화하는 과정에는, 애를 쓰기 때문에 교란이 생긴다. 쓰려는 욕구가 개입하는 순간부터 순수한 경험은 떠나간 지 오래다. 내가 어떤 것을 느낀다고 적은 게 언제나 진실은 아니다. 날조는 힘이 들지도 악하지도 않다. 감각만이 가장 정직하게 설명할 뿐이다.

많이 아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점점 더 자주 그렇게 느낀다. 그냥 좀 더 많은 시간과 기회면 가능한 일들. 수업 하나 듣고, 책 한 권 읽으면 알게 되는 것들. 나이와 같은 것들. 시간이 지나면 보이는 게 많아지고, 오래 살면 누구나 무엇이든 더 알게 된다. 별 거 없다. 초등학생 때 언니들이 얘기하는 감독의 영화들 하나도 몰라서 다 적어두고 하나씩 찾아보던 그때 이후로는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다. 나는 미술관에 관심이 없다. 언제나 삶은 글자 밖에 있다. 유명한 작가와 감독의 이름 그런 것 하나 몰라도 두 눈 똑바로 뜨고 세상을 마주 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11/28

연희동에서 다정이 사운즈굿 미팅 기다리면서 어떤 카페에 있다가 좋은 굴 파스타와 대구 요리를 먹고, 바늘이야기 데이트를 하고 돌아왔다.

11/29

오랜만에 만난 학생자율세미나에서 다 fuck up 해버리자는 소리를 하소연 담아 구구절절 하고, 야식 거하게 시켜먹었다. 멘토 신청이 다음날까지였는데, 에라이 그냥 잤다.

11/30

부랴부랴 제출하고 망연자실 했다가 포케 시켜먹으면서 줌 수업 들었다. 관악구청 갔다가 한신우동. 요즘 우리는 귤 탕후루에 빠졌다. 설입에 괜찮은 카페도 찾아서 기분 좋게 맛있는 커피 두 잔을 마셨다.

12/01

횡설수설이라도 생존 신고를 해야겠다. 친구들을 위해선지, 미래의 나를 위해선지, 둘 다일성 싶다. 어제는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내 돈 주고 거금 들여 머리를 했다. 아직 돈 쓰는 게 익숙치가 않아서 여전히 세상 사람들은 왜 그렇게 비싼 돈 주고 머리털을 손질하나 싶지만 기분은 좋다. 그리고 서촌에서 데이트를 했다. 미용사가 말하기를 청와대가 있던 동네라 치안이 좋다는데, 골목 골목 여유롭고 단정한 게 신기했다. 서촌은 진또배기 서울이고, 내가 있던 설입이니 성수니 그런 곳은 전부 젠트리피케이션 된 이촌향도 청년들의 가짜 서울이었다. 가게 안에는 서울 토종 혹은 최소 십 년은 살았을 깍쟁이 어른들이 고즈넉히 밥 먹고 술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동네를 거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서 우리도 나중에 이 깍쟁이들 틈에 끼어보자 했다. 좁고 오래된 전통주점에서 마흔 전후쯤 되어보이는 커플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는데, 배부르다고 전을 나눠먹자고 했다. 막걸리도 한 잔 시켜서 우리는 여행객이 된 기분으로 식사를 했다.

12/02

이태원에서 쇼핑을 하고 베트남 음식 레스토랑에서 고급 쌀국수를 먹었다. 돌아오는 길에 뎡이가 계속 딸꾹질했다. 그러고 둘다 진이 빠져서 침대에 내리 누워 유튜브 보다가, 필 받아서 핫도그 돌려먹고 잤다.

12/03

마지막 출근이고 사람이 별로 없었다. 화집을 많이 팔았고, 제법 사람 상대가 늘은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좋았다. 끝나고 다정이와 훼미리 칼국수에서 보쌈 정식을 먹었다. 그 먼 길을 편지까지 써서 와줘서 너무 고마웠다. 서울숲 근처 빈티지샵에 갔다가 카페에서 따뜻한 라떼와 콤부차를 마시고 돌아왔다. 수인분당선을 처음 타봤다.

12/4

오랜만에 독일미학 수업을 끝까지 들었다. 사실 들은 게 아니라 앉아만 있었다. 브레히트는 좀 궁금했는데, 처음부터 집중을 안 하니 영 주의력이 돌아오지를 않았다. 집에 가니까 뎡이가 마라탕 대짜리를 시켜둬서 열심히 먹고, 폐기된 조명이랑 좌식 테이블을 주워왔다. 삘 받아서 침대도 이리저리 옮겨보고 다시 돌려놨다. 씻고 나와서 따뜻한 조명 밑에서 마스크팩 하고 팝콘이랑 맥주 먹는데 천국이 따로 없었다. 이 날 일기도 썼다.

12/5

근장 갔다와서 오일 파스타를 해서 전날 가져다놓은 테이블에서 먹고, 낮잠 푸지게 잤다. 전날의 대청소 삘을 이어받아서 다정이랑 설입 온돌에서 고기 먹고, 다이소에 들렀다가 집에 왔다. 비니 쓰고 패딩 입은 뎡이가 아주 예뻤다. 열심히 행거 조립하고, 잠깐 영화 모임 회의도 갔다와서 치킨 시켜먹고, 차도 우리고, 집안일을 열심히 했다. 다정이는 기타 줄을 갈았다.

12/6

이 날도 디자인사는 포기를 하고, 수업과 근장을 다녀왔는데 머리가 좀 아팠다. 다정이랑 제이김밥에서 밥을 먹고 약을 먹고 쉬다가 학자세를 하러 갔다. 8층 계단에서 그래피티 하다가 공유주방에서 새벽 3시까지 자몽 요리 콘테스트를 열었다. 다들 뇌 빠진 소리를 한 마디씩 했다. (열 마디일지도) 일본 근대 시각문화 발표가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다정이가 자료 조사를 도와주었고, 해 뜨는 걸 봤다.

12/7

비몽사몽한 채로 어찌저찌 발표를 끝내고 오니, 완전히 녹다운이었다. 잠 못 자고 밥도 못 먹어서 발표도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그리고 다정이를 만나서 집에 왔는데, 내가 보고 싶었다며 울먹였다. 어디서 이런 천사가 내려와서 나를 이렇게 사랑하지? 싶었다. 나는 내가 못났다며 급 투정을 한바탕 부렸다. 그러고 나니 정말로 못난 생각이 싹 가시고, 나 그리고 우리가 아주 귀엽게 느껴졌다. 다정이가 파스타 간편식을 조리해왔고, 그걸 먹고 커피 모임도 열었다. 돌아와서는 컵라면과 커리를 먹으면서 뎡이가 보고 싶어했던 드라마를 봤다. 이때도 일기를 썼다.

12/8

미술사와 시각문화 기말고사 발등에 불 떨어져서는 대충 지각 제출하고, 다정이랑 잠봉뵈르랑 샌드위치 시켜서 커피랑 같이 먹었다. 나는 잠을 못 자서 좀 자고, 뎡이는 바밍타이거 시사회에 갔다. 내가 데리러 가기로 했는데, 늦어버려서 미안했고 보고 싶어서 힘들었다. 열심히 용산으로 가서 다정이 친구들이랑 퍼멘츠에서 끼니를 달랬다. 날씨가 너무 따뜻해서 이상했다. 그거 말고는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산타옷을 입은 강아지를 봤다. 또 드라마를 보다가 잤다.

12/9

토요일.

영화 모임 회의 잠시 하고 아워홈 국밥 먹고 법대 산책 다녀와서 도넛 시켜먹었다.

12/10

점심에 라면 끓여먹고 또 한바탕 낮잠 타임 가진 뒤에 같이 씻고 비마트를 시켜서 마제소바를 해먹었다. 내려와서는 우리 둘 다 할 일을 열심히 했다.

12/11

대학영어 발표를 하고 연희에 와서 다정이 미팅 기다리면서 미도파에 앉아있는 중이다. 이렇게 정리를 하고 나니 이 주 간의 시간이 눈에 좀 보인다. 기억하고 싶은 이 주였나보다.

1. 왜 우리는 남의 기억에 노스탤지어를 느낄까?

the paradox of romanticizing thg

2. 모어 화자가 아닌 이의 발화는 시와 비슷하다. 나는 영어를 쓸 때 종종 시인이 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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